기고 193

양파 껍질 염색[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천연 염색을 배우다 보니 그 끝은 어디인가 싶을 만큼 빠져 들게 된다. 처음 천연 염색 스카프를 선물로 받았을 때, 천연의 색감이 고와 한 번 배워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섰다. 천연 염색 수업은 매 회기에 생쪽, 메리골드, 황토, 감물, 양파, 복합염 등 배움을 거쳐 얻은 결과물을 받아 들 때마다 만족스럽다. 몇 년에 걸쳐 천연 염색에 매달리다 보니 손끝을 거쳐 나오는 자연의 색감이 신비로웠다. 똑같은 방법으로 염료를 받아 염색 천을 조물거리지만 연출되는 색감은 차이가 난다. 마치 요리 맛은 손맛 있듯 천연 염색도 마찬가지였다. 각각 회원들이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색감은 자연의 흐름 같다. 고정된 색이 아니다. 천연 염색에 취해가는 내가 낯설어질 때가 있다. 천연 염색은 몸으로 하는 작품 활동이다. 염료..

기고 2024.04.16

떳떳한 실속[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천하만사를 처리함에 있어 실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진리일 것이다. 실속이란 “군더더기가 없는 실지의 알맹이가 되는 내용”을 이르니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것을 알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체면 때문에 실속을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유교의 영향으로 실속보다 체면을 더 소중히 여겼다. 특히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은 유교윤리를 표준으로 하여 절의(節義/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청백(淸白/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함), 염치(廉恥/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등이 사회기강의 핵심을 이뤘기에 그와 같은 의식이 더욱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일찍이 우리나라가‘동방예의지국’으로 일컬어졌던 이면에는 유교윤리가 있었다. ..

기고 2024.04.16

행거[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방안의 벽면에 서 있는 행거에 가족들의 옷이 걸려 있다. 외출복, 평상복, 잠옷까지도 걸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옷을 방바닥에 내려놓으면 가족 중 누군가는 얼른 행거에 걸었다. 가족들의 옷이 빼곡하게 걸려있지만, 단 한번도 행거에 걸린 옷이 너무 많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걸어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행거가 위에서 아래로 축 늘어졌다. 아니, 왜 이래 이것도 부서지나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재질이 목재로 되어 있던 행거의 상부와 하부가 만나는 부분이 빠져 버린 것이다. 나는 어떻게 빠질 수 있어 하는 심정으로 이리저리 살폈다. 처음에는 뭐 옷만 걸어 놓았을 뿐이건만, 원망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몇 번 이리저리 만졌지만, 방법이 없었다. 행거를 만들어 팔았던 사람들을 원망해야 하나 ..

기고 2024.03.12

베짱이형 인간[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흔히 부지런함을 상징하는 곤충으로 벌과 개미를 든다. 그런데 둘의 먼 조상이 같아서인지 집단생활을 한다는 점 외에도 여왕벌과 여왕개비, 수벌과 수개미, 일벌과 일개미, 병정벌과 병정개미 등 다형성(多形性)까지 공통점이 있다. 둘 중에서 인간과 친근한 곤충은 달콤한 꿀을 주는 벌이지만 지구상에 12,000여 종이 산다는 개미에게 배울 점도 많다. 개미는 곤충 중에서 비교적 오래 살고 놀랄만한 능력도 지녔다. 여왕개미는 대개 30년 이상을 살며 무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개미는 최고 3년까지 산다. 속도가 빠른 개미는 시속 300미터로서 그것은 인간이 시속 1,500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한 자신보다 수십 배나 무거운 것을 물고 가는 것은 마치 인간이 자동차를 짊어지고 가는 것과 맞먹는..

기고 2024.03.12

괘종시계[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거실에 걸려 있던 괘종시계가 사라진 자리가 휘영했다. 삼십 년 넘게 한자리에 있던 괘종시계였다. 괘종시계가 있었던 자리의 벽지 색깔은 이중적으로 드러나 있다. 마치 속살과 겉살처럼 선명했다. 벽면 괘종시계가 있던 자리는 도장을 찍은 듯 뚜렷했다. 앞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큰 숫자가 누가 보든 시원하게 식별이 가능했다. 하부에는 시계추가 있다. 긴 추와 짧은 추가 함께 있다. 시계추는 시간만큼 ‘땡,땡’ 소리를 울렸다. 고요할수록 시계추의 울림은 크게 들렸다. 한밤중에 눈감고도 시간을 가늠해 보려면 시계추 소리를 의식적으로 헤아리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잠 속에 빠질수록 들리지 않은 소리였다. 깊은 잠을 못 이룰수록 뚜렷했다. 그처럼 시계추의 역할은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니 분명히 있었다. 어릴 때 듣..

기고 2024.02.20

고양이의 보은(報恩)[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사람 이외의 동물을 짐승이라 한다. 짐승이라는 말의 어원은 한자어인 중생(衆生)으로서 본래는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런데 15세기부터 사람이외의 동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애써 자존하는 데서 비롯되었으리라. 또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사람만이 감정을 가진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짐승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행동할 뿐 감정이 없다는 주장은 사람들의 차별의식에서 비롯된 억지인지도 모른다. 침팬지는 껍질이 단단한 열매를 돌로 쳐서 깨먹기도 하고 푸나무 가지를 꺾어 침을 바른 다음 개미굴에 넣었다가 재빨리 꺼내어 거기에 기..

기고 2024.02.20

영자 씨, 영면에 들다[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기후 여건도 불안한 시기다. 집중 폭우가 한판 우리 지역을 뒤집어 놓았다. 평화로웠던 논판은 패대기를 당한 듯 힘이 풀려 있다. 꽉 들어차 있던 논밭에 흙들은 볼이 패인 듯 야위었다. 그 상처로 불안해하는 상황에 또 다시 태풍이라니 무엇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멍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올해 밭농사는 비가 다 데려갔으니 어쩔 수 없다며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마을 회관에서 모인 김에 밥을 지어먹은 후 헤어졌다. 잠자리에 들 무렵 병원에 있던 우리 마을 영자 씨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연락이 왔다. 영자 씨는 얼마 전 쓰러져 입원 중이었다. 그녀는 타지역에서 우리 마을로 이주해 왔다. 우리 마을 원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팔십 세다. 그런데 영자 씨 연령은 평균 연령보다 젊어 마을 전체 평균 연령을 ..

기고 2023.12.11

인심[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소슬바람이 차창을 스치며 길섶에 줄느런한 가로수의 단풍 옷을 벗긴다. 추수를 마친 들녘이 휑뎅그렁하고 마을 언저리와 밭두렁의 감나무에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하다. 마을 어귀의 길가에는 늙수그레한 농부가 벼를 말리느라 바쁜데 단풍놀이 행락객을 태운 차량들이 붉게 물든 산으로 줄줄이 향한다. 인근 뙈기밭에서 된서리를 맞은 고추가 시들어가고 저만치 널따란 밭에는 요즘 보기 드문 목화가 다래 입을 짝 벌려 하얀 솜을 흠씬 머금었다. 시골길 여기저기에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가을날의 정서와 단풍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길을 나선 오후, 야트막한 고갯마루를 넘어가다가 길가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어느 마을에서 멈추었다. 마을 인근의 밭두렁에 먹음직스럽게 열린 감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돌..

기고 2023.12.11

숫돌[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어릴 적 아버지가 일하는 자리에는 숫돌이 함께했다. 아버지는 일터로 나가기 전 하루 써야 할 농기구부터 챙겨 놓은 후 아침 식사를 했다. 아버지의 두 개의 숫돌 중 하나는 우리 집 수돗가 거치대에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일터로 가지고 가 수시로 무딘 날을 갈아 썼다. 숫돌은 아버지에게는 꼭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것을 무심하게 봤다. 숫돌이 가끔은 휩쓸려 다른 자리에 굴러다녀도 그러려니 모른 척 지나쳤다. 이웃집에 홀로 사는 친구 엄마는 갈아야 할 낫을 몇 자루씩 아버지에게 갈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그럴 때도 심혈을 기우여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숫돌에 날을 문질렀다. 숫돌에 날을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몰아의 경지였다. 그곳을 지날 때면 ‘쓱’ 날이 갈리는 소리만 들렸다. 숫돌에 날을..

기고 2023.11.15

산기슭의 황혼[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너렁청한 들판에 내려앉은 황금빛 가을이 눈부시다. 싹을 틔워 하늘을 향해 자라던 벼가 이삭을 달고 속이 차니 땅이 그리운지 모두 고개를 숙였다. 결국 황혼에 이르러서야 자기가 난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찬바람머리의 백아산 어귀, 주차장에서 내리자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잎들이 코앞에서 반긴다. 옆자리에서 가을바람에 한닥이는 느티나무 잎사귀들도 수줍은 새색시 얼굴빛마냥 발그레하다. 근처 묵정밭에 흐드러진 억새는 탐스런 흰머리를 날리며 황혼의 아쉬움을 달래는데 이웃한 뙈기밭의 단수수가 머리를 꼿꼿이 세워 그 모습을 지켜본다. 참새들이 한눈파는 단수수의 알갱이를 눈독 들이며 부산하고 풀벌레 소리가 은은한 그곳에는 두메의 정취가 물씬하다. 골짜기로 들어서자 산록의 쌀쌀함이 옷깃을 여..

기고 2023.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