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여건도 불안한 시기다. 집중 폭우가 한판 우리 지역을 뒤집어 놓았다. 평화로웠던 논판은 패대기를 당한 듯 힘이 풀려 있다. 꽉 들어차 있던 논밭에 흙들은 볼이 패인 듯 야위었다.
그 상처로 불안해하는 상황에 또 다시 태풍이라니 무엇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멍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올해 밭농사는 비가 다 데려갔으니 어쩔 수 없다며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마을 회관에서 모인 김에 밥을 지어먹은 후 헤어졌다. 잠자리에 들 무렵 병원에 있던 우리 마을 영자 씨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연락이 왔다.
영자 씨는 얼마 전 쓰러져 입원 중이었다. 그녀는 타지역에서 우리 마을로 이주해 왔다. 우리 마을 원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팔십 세다. 그런데 영자 씨 연령은 평균 연령보다 젊어 마을 전체 평균 연령을 내려 주는 역할도 했다.
그녀는 전형적인 농사꾼으로 살아온 우리 마을 사람들과는 삶의 형태가 달랐다. 그런 탓에 마을 사람들은 다른 이주해 오는 사람들에게는 택호를 붙였지만, 영자 씨만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자 씨 부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매일 운동을 했다. 농사가 생업이 아니기에 일과가 우리들과는 다름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집 안팎에는 온갖 꽃나무로 가득 차 있다. 사시사철 영자 씨네 집은 예쁜 꽃들이 만발했다. 영자 씨는 비가 내리는 봄이면 호미를 들고 살았다. 이웃들에게 꽃나무를 분양하기 위해서였다. 거룩한 생명 나눔처럼 극진했다. 행여 한 뿌리라도 상할까 두 손으로 받들었다. 영자 씨 덕분에 우리 마을은 꽃동산이 되어 갔다. 나는 우리 집에 오는 손님도 가끔 영자 씨네 집으로 데려가 꽃구경을 시켰다. 영자 씨 남편은 방 안에 있는 법이 없다. 집에 있는 시간에는 손에 작은 농기구를 들고 꽃나무를 가꾸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꽃을 피우는 일이 저처럼 수고로움이 있구나 싶었다. 그로 인해 내가 꿈꾸었던 꽃피는 예쁜 집을 짓는 일 마저 망설여졌다.
그녀의 집 주변에는 양다래와 무화과를 심어 가을이면 먹음직스럽게 열매가 열렸다. 나는 무화과를 따 먹기도 했다. 물론 영자 씨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장기간 제주도로 여행을 가 무화과가 농익어 떨어질 위기라서 먹어 주는 게 예의 같았다.
영자 씨는 나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좀체 걱정 근심을 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즐겁게 보였다. 노래를 좋아해 노래만 나오면 따라 불렀다. 그녀는 마을 회관에서 사람들이 긴박한 이야기를 해도 무시하고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웃게 했다. 사람들 역시 영자 씨에게는 근심스러운 이야기는 피했다. 영자 씨는 말수와 머리숱이 적은 편이다. 마을 안에 있을 때는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채 지내지만, 외출 할 때는 가발을 썼다. 그러면 다른 인물 같았다. 나는 그런 영자 씨 모습이 예쁘고 젊어 보여 칭찬을 듬뿍해주곤 했다. 그러면 영자 씨는 씩 웃었다. 영자 씨는 항상 즐거워 보였고, 누구 흉허물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항상 최신식 가요가 흘러나왔다. 연예인 정보는 영자 씨가 다 알고 있었다. 함께 TV를 볼 때 어느 연예인의 정보는 놀랍도록 세세하게 말했다. 그 연예인 사돈네 팔촌까지 다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이나 마을 회관에서 진을 치고 살지만, 그녀는 노래 교실에 간다며 차려입고 읍내로 나섰다. 영자 씨는 남편과 팔도를 여행 다니는 여행가이기도 했다. 그녀 남편의 꿈은 아내를 옆에 태우고 좋은 곳은 다 찾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영자 씨는 남편을 하늘로 알고 사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화가 나면 고개를 숙이고 들어주면 끝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왜 고개를 숙이느냐며, 똑바로 쳐다보며 불을 뿜어 기를 죽여야지 라고 해 웃었던 기억이 있다.
마을 회관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항상 남편에게 주고 싶어 하는 눈치가 보였다. 눈치껏 남편에게 가져가게 하면 신바람이 나 들고 갔다. 우리 마을은 영자 씨 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가족에게는 먼저 나눴다. 하지만 영자 씨 남편은 거동은 불편하지 않았다. 단지 주소지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마을 주민 자격이 없다며 마을 행사에는 일절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래서 영자 씨는 남편이 너무 정직하다며 속상해했다. 영자 씨는 남편이 지적으로 대단한 사람임을 가끔 자랑했다. 그런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영자 씨가 말하는 대로 남편은 박식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예의가 바르고, 정당에 대한 당적이 분명해 지역당을 고수하려는 애착심도 강했다. 보통의 이주민은 그 마을에 민심을 살피며 적당히 묻히기도 하지만, 영자 씨의 남편은 선이 분명했다. 영자 씨는 남편의 말이라면 하늘의 말로 믿고 따르는 점이 나와는 아주 달랐다.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남편쯤이야 하고 무시하지만, 영자 씨는 일단은 남편 의견이 먼저였다.
마을 회관에서 부침개를 하다가 뒤집개가 부러지면 영자 씨는 눈치 보지 않고 얼른 당신 집에서 뒤집개를 가져와 주방 일이 원활하게 했다. 그런 영자 씨가 깊은 잠에 들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금방 일어나 씩 웃으며 회관 주방으로 얼굴을 내밀 것 같았다.
나는 영자 씨 영전에 향을 꽂으며 당신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워야 하느냐며 눈물지었다. 그녀가 먼 곳으로 가 다시 마을 평균 연령은 올라갈 것이고, 정부에서 지급되는 노인 마을 수당은 턱거리로 겨우 받았는데, 인제 그 수당도 장담할 수 없게 됨이 아쉽다고 나는 머리로 셈 했다. 엉뚱한 웃음을 선사해 분위기를 밝게 전환해 주었는데 그 일은 누가 할까. 나는 눈물을 훔치며 영자 씨 하늘에서 좋은 터 잡아 꽃 많이 심으세요. 하며 명복을 빌고 나왔다.
영자 씨 남편이 제일 많이 울었다고 했다. 영자 씨 남편이 직접 병간호를 맡아 했다가 몸에 무리가 온 상태였다. 남편 재산이 있다고 한들 돈이 그 허전함을 메워줄 수 있을까. 자식이 아무리 효자라고 하더라도 영자 씨 앉았던 자리만 하겠는가. 그가 발끈 화를 내도 세상에 어느 누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주겠는가. 함께 오손도손 마주 보고 밥을 먹어 줄 사람이 없으니 영자 씨 남편이 제일 슬픔의 무게가 클 것이다.
영자 씨의 딸은 어머니가 너무 갑자기 가신 게 서운하지만, 뇌혈관 이상으로 회복이 어려운 상태에서 살면 무엇 하겠냐. 딸은 쉽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 드렸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각자 셈하기 편리한 방식으로 인수 분해 했다. 마을 사람은 “삶이 이렇게 허망하다며 누구나 가는 길에 편안하게 잘 가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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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82421
#김미 #수필가 #영자씨영면에들다 #미래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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