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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미래뉴스입니다 2023. 12. 11. 16:13
박 철 한

소슬바람이 차창을 스치며 길섶에 줄느런한 가로수의 단풍 옷을 벗긴다. 추수를 마친 들녘이 휑뎅그렁하고 마을 언저리와 밭두렁의 감나무에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하다. 마을 어귀의 길가에는 늙수그레한 농부가 벼를 말리느라 바쁜데 단풍놀이 행락객을 태운 차량들이 붉게 물든 산으로 줄줄이 향한다. 인근 뙈기밭에서 된서리를 맞은 고추가 시들어가고 저만치 널따란 밭에는 요즘 보기 드문 목화가 다래 입을 짝 벌려 하얀 솜을 흠씬 머금었다. 시골길 여기저기에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가을날의 정서와 단풍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길을 나선 오후, 야트막한 고갯마루를 넘어가다가 길가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어느 마을에서 멈추었다. 마을 인근의 밭두렁에 먹음직스럽게 열린 감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돌감보다는 굵었으나 겨우 어린아이 주먹만 한 감들이 가지가 찢어질 만큼이나 많이 열려 있었다. 감나무 전체가 마치 커다란 붉은 꽃송이처럼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곶감을 만들기에는 약간 작은 감이지만 홍시는 큰 것보다 작은 게 훨씬 맛이 좋다는 점을 알기에 군침이 돈다.
밭에서 가까운 집의 아낙네에게 물어 그 감나무 주인집을 찾아가니 중씰한 남자가 의아한 눈초리로 맞았다. 다짜고짜로, “저쪽 밭두렁의 감나무에 열린 감을 조금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찾은 이유를 밝혔다. 그러자 득달같이, “한 상자만 따 가십시오. 올해는 감이 참 많이 열렸습니다.”라고 말한다. 값을 지불하려고 가격을 물어도 필요 없다며 극구 사양하는 그 눈길에 따스한 정이 한가득하다. 한 상자가 뜻하는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감 한 상자는 대개 15킬로그램이니 감의 크기로 보아 이 정도면 족히 7∼80 개는 될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혹 낯선 사람이 찾아와 대뜸 그와 같은 부탁을 할 때, “그냥 몇 개만 따가시오.”라는 말은 할 수 있을지라도 그토록 많은 양을 허락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감나무 아래로 가서 손이 닿는 곳에 달린 감 50여 개를 땄다. 감 하나하나를 비닐봉지에 넣을 때마다 훈훈한 인심도 딸려 들어가니 어찌 푸짐하지 않으랴.
몇 해 전 감이 익어가는 가을날에 섬진강변의 농삿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귀꿈스런 모퉁이를 돌아서자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길옆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밭둑에서 시시덕거리며 감을 따고 있었다. 그 자리를 막 지나칠 즈음 저만치 산기슭에서, “거기 누구요? 왜 남의 감을 말도 없이 따는 거요?”라고 외치는 촌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시골 인심도 예전 같지 않아!”라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차로 향했다. 어쩌면 그들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골 인심에 대한 생각을 대변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남의 감을 몰래 따면서 단속하는 주인을 오히려 야박한 인심의 소유자로 여기다니 제삼자까지 각칠만한 체메들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차에 오르려는 순간, 정감어린 촌로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조금만 따가시오.” 그 한마디는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담백하고도 웅숭깊은 심성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다시 감나무로 향하며 머쓱해하는 두 사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인심 좋은 시골’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마치 초원을 가로지르는 조각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다. 그동안 “시골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라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같은 말을 듣더라도 고개를 가로저으리라. 정겨운 그 인심이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로부터 자연경관이 수려한 데다 인심이 두둑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이 땅을 금수강산이라 하지 않았으랴.
어느덧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한데 멀찌감치 밭 다랑이에는 노부부가 기우듬하게 서서 콩을 거두느라 부산하다. 향긋한 솔향기를 실은 가을바람이 새하얀 억새를 물결치며 쏜살같이 고개를 넘고 정겨움을 가득 품은 시골길에서 짐벙지게 보낸 하루도 서서히 저문다. 귀하게 얻은 감을 가지고 집으로 향하면서 몰캉한 것을 골라 입에 넣으니 그야말로 꿀맛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훈훈한 인심을 마음속에 가득 담았으니 얻은 것이 어찌 감뿐이었으랴. 감은 머지않아 없어지겠지만 그 후한 인심만큼은 오래오래 간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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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철 한 소슬바람이 차창을 스치며 길섶에 줄느런한 가로수의 단풍 옷을 벗긴다. 추수를 마친 들녘이 휑뎅그렁하고 마을 언저리와 밭두렁의 감나무에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하다. 마을 어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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