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93

만학도의 교실 풍경[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배울 기회를 놓친 고령의 학습자들과 수업을 하다 보니 참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학습자들은 몸이 불편해 걷는 것도 힘들지만, 배움에 대한 열의만은 오뉴월 장작불보다 뜨겁다. 학습자들은 오로지 한글 공부만이 당신들이 인정하는 공부였다. 미술, 노래 수업은 공부가 아니다. 다음날 미술 수업이라 미리 알려 드리면 교실이 텅텅 비기까지 한다. 연간 계획된 수업이기에 중간에 취소가 어려워 진행이 되면, 왜 그런 쓸데없는 것을 가르치느냐며 되레 호통을 친다. 학습자들은 공부에 포한 진 까닭에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학습자들은 화장실에서 앉아 있는 시간도 아까워 쏜살 같이 뛰어온다. 온전하지 못한 걸음걸이로 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이 칠판 앞에서 서있는 내 눈에 훤히 다 보인다. “왜 위험하게 달려오는 데요.” 했더니..

기고 2024.10.14

고라니의 눈망울[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마른장마가 이어지는 여름날에 농삿길을 걸으니 새파란 들녘에 생기가 넘친다. 엊그제 모내기를 한 것 같은데 어느새 새끼를 친 벼 포기가 토실토실한 것이 배동바지가 머지않은 듯하다. 예전 같으면 농부들이 만도리를 하느라 부산할 텐데 요샌 주로 우렁이를 넣어 잡초를 제거하니 그럴 필요가 없다. 저만치 논배미에는 두루미 예닐곱 마리가 한가로이 먹이 사냥을 하고 있다. 아마도 제초작업에 투입된 우렁이가 임무를 마치기도 전에 두루미에게 잡아먹히고 있으리라. 농삿길을 따라 이어지는 폭이 3미터도 안돼 보이는 도랑에는 양쪽 둑이 다듬어진 돌과 콘크리트 수직 벽으로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 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그 도랑에 갇혀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수직의 양쪽 둑은 저 먼 곳까지 높이가 ..

기고 2024.10.14

비빔밥[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농번기에 마을에서 마을 공동체 식사를 신청했다. 마을 분들이 모두 좋아했다. 집에서 혼자 먹는 밥보다는 함께 어울려 먹는 밥이 훨씬 살로 가고, 사는 맛이 담겨 있다며 환영했다.신청한 마을은 사정에 따라 인근 식당에 의뢰하기도 하고, 직접 마을 식구들이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우리 마을은 자체 해결로 합의했다. 마을 안에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혼자 먹는 밥은 대충하게 된다. 공동체 식사는 번거롭더라도 영양가와 맛을 고려해 실속 있게 하자고 했다. 다행히 주방에서 일손을 거드는 사람들은 마을 안에서는 70대 언니들이다. 막상 예정된 날 팔십 대 언니들도 해 먹던 가락이 있으니 더 일찍 주방 일을 거들었다.주방 진두지휘는 왕년에 식당 운영 경력이 있던 언니가 맡게 되었다. 참여하는 모든 언니가 요리에는..

기고 2024.09.10

물고기여! 어구(漁具)를 회피하라[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추석을 앞두고 영광 법성포로 차를 몰았다. 추석 차례 상에 올릴 굴비를 본고장에서 구하기 위함이었다. 지인에게 소개 받은 가계를 찾아 굴비를 구입하고 점심때가 되어 그곳에서 유명한 굴비정식을 먹을 요량으로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며 영광굴비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 어렴풋이나마 그 현실을 알게 되었다.굴비의 본고장은 영광이지만 오늘날‘영광굴비’라는 브랜드로 유통된 것들은 대부분 추자도, 목포, 제주도 등 다른 곳에서 잡힌 조기들로써 영광에서는 굴비로 가공만 한 것이란다. 과거에는 영광에서 잡혀 가공한 것을 영광굴비라고 했지만 최근 들어 영광에서의 어획량이 줄어들자 다른 지역에서 조기를 가져와 가공만 영광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광에서 잡힌 조기로 가공한 진짜 영광굴비는..

기고 2024.09.10

고향의 그 바다[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모든 것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내 가슴속에 깊숙이 간직된 고향만은 아련한 추억 그대로 남아 있다. 지독했던 가난마저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떠오른다. 이것이 신비로운 고향의 힘인가 싶다. 바다가 앞마당처럼 자리를 잡고 있던 고향마을. 방문을 열면 바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부모 형제의 얼굴보다 바다를 수시로 살피며 자랐다. 문밖에 바다는 수시로 변화했다. 밀물과 썰물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의좋은 형제 같았다. 바닷물이 잔잔하게 들어차 올 때는 짙푸른 보자기를 펼쳐놓은 듯 마음마저 평화로웠다. 반면 바람이 거센 날은 파도가 마을을 다 삼켜 버릴 듯 허연 입을 벌여 달려들 것 같아 얼른 눈을 돌려 버렸다. 어른들은 바다를 보며 한 해의 기운과 일기를 살피며 바다와 관계를 유지했다. 가족의 깊은 마음보..

기고 2024.07.08

공생[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누이 좋고 매부 좋다’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일에 있어 서로에게 모두 이롭고 좋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양쪽 다 이익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을 공생이라 한다. 공생이라면 동물끼리의 공생에서부터 곤충은 꿀을 먹고 식물은 꽃가루받이를 하는 동물과 식물의 공생이나 콩과식물과 뿌리혹박테리아(근류균)의 공생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그런데 한쪽만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이익도 손해도 없는 편리(片利)공생도 있다. 하지만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공생임을 감안할 때 ‘편리’에 ‘공생’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잠포록이 마른장마가 계속되며 주니가 나던 여름날에 지상파 방송에서 공생에 관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거기에서는 주로 동물간의 공생이 소개되었는데 그 오묘한 이치가 놀랍다. 동물..

기고 2024.07.08

낙타와 바늘구멍[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전화벨이 울어댄다. 해도 줄어들지 않는 일들을 두고 도대체 이런 일들은 언제나 끝이 날까 하는 생각에 심난한 순간이었다. 손전화기에 이름자를 보니 미안하게도 전화 받기가 주저된다. 전화벨은 빨리 받으라고 조르듯이 울어댄다. 되도록 전화벨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일을 했다. 결국 전화는 스스로 고함을 질러대다 지쳐 멈췄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자존심 상해할지 짐작도 간다. 그 친구는 취약 계층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고운 외모에 말투가 부드러웠다. 보살피는 아이들에 관한 일로 함께 의견을 나눌 때도 많았다. 어떤 상황의 문제든 차분하게 생각하고 웃음으로 다가와 가닥을 잡아가며 서로에게 마음의 위안..

기고 2024.06.11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안시성전투[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중국 땅을 거쳐 백두산을 여행한 한국 사람이라면 국제적으로 백두산이 중국에 위치한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으리라. 물론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백두산을 가로지르니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백두산의 북쪽과 남서쪽 측면은 장백산으로 불리는 중국 땅이지만 최고봉이 위치한 남동쪽 측면은 엄연히 북한 땅임에도 국제적으로 백두산이 완전한 중국의 산인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2000년대부터 시도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도 문제다. 동북공정이란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를 말한다. 그 핵심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명목을 내세워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1992년 한중 수교 ..

기고 2024.06.11

입주하는 날[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그동안 우리 부부는 스스로 마련한 집이 없이 살아왔다. 부모가 살던 집에서 지내다가 자영업을 하며 안집이 없이 상가에서 살았다. 안정된 공간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게 일을 줄이는 거라 여겼다. 그런데 언젠가는 안집을 필요하게 될 거라 여겨 안집 마련을 꿈꾸고 있었다. 대대로 살아오던 동네를 떠나 편리한 아파트로 이사도 생각했다. 왠지 그래도 자연과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시골 마을에 미련이 더 많았다. 친밀한 사람들은 집 종노릇만 하려고 하느냐고 하지만 섬길 수 있는 집이라면 섬기고 싶었다. 그러나 인연이 닿는 집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다 결국 다 늦은 나이에 아파트로 끌려가야 될까 겁이 났다. 그러던 찰나 내가 그토록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집이 매매된다는 것이다. 그 집은 우리 마을에 살던 노부부..

기고 2024.05.21

품앗이[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아침부터 끄느름하더니 이내 봄비가 내린다. 소나무들이 생명수를 마시며 미소 짓는데 삼백예순날을 별러 눈부시게 꽃단장을 한 벚나무는 시무룩하다. 궂은 날씨에 대여섯의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비옷으로 무장하고 논에서 토란을 심고 있다. 꽃샘추위에다 가랑비까지 내리니 하나같이 쌍그런 모습들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가서 품삯이 얼마냐고 묻자 예수남은 아낙이 말한다. “품삯이라니요, 품앗이니까 이런 날씨에 일을 나왔지요.” 하긴 그렇다. 만약 품앗이가 아니라면 그 날씨에 품삯을 받고 일할 사람이 없었으리라. 임금노동이 대부분인 오늘날에 용케도 품앗이 관경을 보니 적잖이 반갑다. 품앗이는 촌락에서 노동의 교환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공동노동을 말한다. 조직상으로 보면 농가상호간에 편의와 이익을 주고받는 호혜의식(互惠意..

기고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