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이 책은 신형철 선생님이 쓴 책으로 슬픔을 공부해서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 의지할 곳을 찾는 것 같다. 나 또한 나를 믿지만 무언가 불안하고 외로울 때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어진다. 내가 엄마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엄마는 대부분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지만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위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위로란 곧 인식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슬픔의 순간이 기쁨의 순간보다 더 많다는 것을 느낀다. 옛말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뻔한 말 같지만 사람은 슬플 때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위로해주기를 바란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면 슬픔은 잠시나마 작아지는 게 사실이다. 사실 당시에는 절대 못 지날 것 같던 위기도 결국 지나기 마련이고 돌이켜보면 그때 누군가의 위로가 내 슬픔을 덜어주었던 적이 많다.
사실 난 중학교 때까지 친구, 가족, 집 등 모든 것이 완벽했고 내가 중심에 있다는 자신감 속에 살았다. 하지만 17살 나이에 그동안 나의 토대가 되었던 모든 것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는 나의 야심찬 유학기는 생각보다 험난했고 생각보다 슬펐다. 세상은 넓었고 무림에 고수는 차고 넘쳤다. 그들과 경쟁해야 했고, 그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를 믿었다. 이러한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나를 더 크고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그리고 난 잘 이겨내고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느끼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나도 곧 성인이 되니 나의 슬픔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만큼 누군가에게 나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내 ‘한계’를 인식하는 과정이 조금 어렵고 혼란스럽지만 저자가 말한 것처럼 상대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위로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으려 한다. 저자는 완전함을 추구하면 항상 남을 의식하게 되고 상대를 비난하게 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온전함을 무언가 조금 비워도 되는 여유를 갖고 있다고 하니 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완전함이 아닌 온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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