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연리지[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가]

미래뉴스입니다 2021. 11. 24. 17:15

김   미 수필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친정아버지 기일이었다.

형제들은 다 모이지는 않았다. 시국이 이러하니 아버지도 이해해야 한다고 막내가 넉살을 피웠다. 갑자기 조촐해진 식구들이지만 제사 파전 날은 영광 불갑사에 가는 일만은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행장을 차리고 길을 나섰다.

우리 가족사에는 독특한 사연이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피난민이었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윈 아버지는 할머니와 단둘이 하늘과 땅처럼 서로가 마주하며 살았다. 모자는 어디서 혼자 먹는 음식은 넘기지 못했다. 집에 있는 가족 생각 때문에 입맛이 없다며 뒤로 밀어 놓았다가 그것을 다시 집으로 가져와 먹였다. 모자는 서로 그러지 말라면서도 가져온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더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아버지가 군대에 가야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편지를 보낼 때 건강하게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할 때는 거북이 하나만 그려 보내라고 했다. 문맹이신 할머니는 귀한 아들의 편지를 누가 읽어주는 것도 불편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편지 속에 거북이가 그려져 오면 그것을 아랫목 방 벽면에 붙여놓고 아버지가 군 생활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군대에 있는 동안은 방안에 군불을 지피는 법도 따뜻한 음식을 먹는 법도 없었다. 아들은 추운 변방 생활을 하는데 어미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없다며 한파에도 추운 방을 고집했었다. 익힌 음식도 다 식힌 후에야 먹었다. 추운 날은 방안에 물그릇이 돌처럼 얼었다고 했다. 아들에게 편지가 오는 날은 할머니는 가장 마음이 평온한 날이었다고 했다.

그런 아들이 몇 달 동안 소식이 없었고, 인근 마을에 군대 갔던 젊은 청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잠도 먹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아들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죽어야겠다는 각오로 군대가 있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강원도 군부대에 있던 아버지에게 가는 길은 교통도 불편해 절반은 차로 갔지만, 나머지는 산을 넘고 들판을 걸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걸어 도착했다. 비상 상황인지라 군부대는 면회도 부대원들의 휴가도 어려웠다. 할머니는 죽더라도 아들 얼굴 한 번만 보고 죽겠다며 떼를 썼다. 할머니는 군부대에 도착 될 때까지 자고 먹는 일이 어렵기만 했다. 할머니의 행색은 뿌리가 손실된 나무처럼 휘청거려 환자의 모습이었다. 한복 차림으로 나섰던 할머니의 저고리 동정은 닳아 너덜거렸고, 흰 고무신은 찢어진 상태였으며, 한복은 땟국에 절어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할머니를 보자 첫 마디가 ‘어머니 이런 옷차림으로 왜 여기까지 왔냐’며 못마땅한 표정을 보였다. 할머니는 그날의 아버지에 대해 섭섭함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렇게 먼 길을 오느라 얼마나 애를 쓰셨냐고 할 줄 알았건만 아버지도 할머니의 서운해하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하는 일마다 자랑스러워했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훔치셨다.

아버지도 술 한 잔을 드시면 그날의 불효를 반성했다. 아버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할머니의 잠자리를 손수 살펴드리는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면 그 방에 기거하며 할머니의 병시중을 들었다. 할머니 방에 군불을 지피는 일도 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직접 해야만 마음을 놓였다. 다른 가족들에게 맡기면 행여 불 지피는 일에 소홀해 방바닥이 따뜻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해지자 업고 다니며 할머니의 다리를 대신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효성에 보답하려는 듯 장수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노병으로 자리에 눕자 전답을 장만하기 위해 평생을 피땀 흘려 모았던 돈도 할머니 병원치료에 다 받쳤다. 어머니가 편찮아 힘들어하는데 땅은 사 무엇 하겠느냐는 거였다. 할머니가 노병으로 힘들어할 때는 리어카에 태워 면 소재지의 병원에 수시로 모시고 다녔다. 아버지는 인근에서 효자로 소문이 났다고 했다.

효자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고전을 자주 읽었던 아버지는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나오는 이야기를 했다. 후한 말의 문인인 채옹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삼 년 동안 옷을 벗지 못하고 간호해드렸다. 마지막에 병세가 악화하자 백 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 않고 간호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다며 자식의 도리는 끝이 없다고 했다.

그 여묘(초막) 옆에서 나무가 자라났는데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 한 결을 이루었다는 것은 곧 자식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바친 것이며. 즉 부모와 자식이 한 몸, 한 나무가 되어 있다는 상징으로 본 것”이라고 했다.

연리(連理)는 서로 다른 나뭇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하나로 통해버린 것으로 ‘리(理)’란 나뭇결을 말한다고 했다.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말한다. 이처럼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은, 효성이 지극한 부모와 자식을 비유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농사일이 한가한 날이면 나들이 삼아 집에서 가까운 이곳, 영광 불갑사를 다녀오셨다. 불갑사 화장실 옆에는 수종이 다른 나무가 밑동이 붙어 자라고 있었다. 느릅나무와 갈참나무다. 불갑사 연리지를 보며 부모님께 잘 못 했던 것이 생각났다. 저마다 불효했던 일들을 고백했다. 나는 아버지가 땡볕에 보리 이삭을 한 톨도 빠짐없이 줍게 하는 것이 싫어 일부러 다리를 돌에 부딪쳐 고생했던 일을 떠올렸다. 몸을 부려 사람의 도리 얻게 됨을 뒤늦게 알았다. 큰오빠는 아버지가 전답을 사지 않고 할머니 병원비로 사용해 버린 것이 아쉽기만 했는데, 이렇게 가난을 통해 형제가 우애할 수 있는 귀한 재산을 주었다고 했다. 둘째 언니는 끼니도 어려운 살림이 형제만 ‘줄줄이 사탕이’라고 아버지를 향한 무모한 가족애를 원망했는데, 형제들을 통해 가난함이 마음의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우리 형제는 부모님의 몸을 빌려 태어난 가지이니 서로서로 우애하며 살자고 했다.

그 첫 번째 약속으로 부모님의 제삿날만이 아니라 틈틈이 아버지처럼 고전을 읽고 카카오톡에 독후감을 올려 마음에 양식을 챙겨주자고 했다. 부모님의 몸을 빌려 나온 우리 형제자매도 부모님의 뿌리에서 나온 여러 가지이니 서로 결을 합쳐 한가지처럼 살자고. 부모는 살아 생전에도 자식들에게는 은덕이지만 돌아가신 후도 그 그늘로 살아가게 됨을 마음속에 깊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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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

김 미 수 필 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친정아버지 기일이었다. 형제들은 다 모이지는 않았다. 시국이 이러하니 아버지도 이해해야 한다고 막내가 넉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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