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천을 떠나오며[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미래뉴스입니다 2022. 5. 11. 17:49

김  미 수필가

제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도시였다. 제천에서 30분만 더 가면 강원도라고 했다. 강원도라고 하니 그 거리가 실감이 났다. 도착해 보니 어두운 밤이었다. 기온은 차가워 몸을 움츠리게 했다. 나는 제천 장례식장에서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아무것도 입에 넣을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었다. 입관식에서 본 망자는 곱게 화장해 생전처럼 평온한 모습 그대로였다. 주머니도 없는 삼베옷으로 차려입고, 평생 종종거렸던 발은 삼베 꽃버선 신고, 손 덮개를 씌운 손은 가슴 위에 얹고 잠자듯 누워있었다. 향년 64세 생애를 마감하고 먼저 가는 올케언니를 어떻게든 붙들고만 싶었다. 올케언니와 가족으로 살아온 세월이 40년이나 되었으니 그 정을 못 잊어 몸부림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4년 전쯤 퇴직을 앞둔 오빠는 고향 선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집은 아니었지만, 정성을 다해 황토벽돌로 집을 지었다. 그 집 짓기까지는 마음고생. 몸 고생이 많았다. 건축자재도 손수 선택하고 몇 년 전부터 구상한 집을 짓기 위한 발품을 파는 일까지 했다. 온 정성을 다해 지은 언덕 위의 집은 말끔하고 아담했다. 선산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은 자연의 숨소리 같았다. 집 마당 아래 저수지 물빛은 비취색으로 찰랑거렸고, 고개를 들면 하늘의 구름은 맑고 푸르렀다. 오빠네 집에 들어서면 무릉도원처럼 세상 근심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당 한쪽 황토 텃밭에는 토마토, 오이, 가지들이 지주대를 타고 올라 열매를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았다. 산비탈에 돋아난 푸성귀를 예쁜 그릇에 담아 대접하는 언니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 같았다. 고개 너머 친정 마을에 오빠 내외가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 든든했다. 오빠 내외가 그곳에 입주한 첫봄이었다. 올케언니는 들뜬 목소리로 양지의 봄 쑥이 진한 향기를 뿌리고, 선산의 솔바람이 살갗에 스친다며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

그해 5월 초순이었다. 식곤증으로 꾸뻑 졸고 있을 때 걸려온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빠가 몸을 못 가누고 말이 어눌한 걸 보니 예사롭지가 않다는 거였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가보니 오빠는 뇌출혈 증세로 적기를 넘겨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한 오빠는 의식이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운동을 좋아해 틈만 나면 운동으로 일을 삼았다. 응급실 의자에 넋을 놓은 듯 앉아 있는 올케언니에게 어찌 이 시간까지 두고 봤느냐고 물었다. 오빠는 눈만 뜨면 운동을 했던 사람인지라, 생각도 못 했다는 거였다. 본인도 병원까지는 필요 없다고 해 그 말만 믿었단다. 팔에 힘이 없다기에 마사지만 해 주고 한숨 푹 자고 나면 좋아질 거로 생각했다는 거였다. 오빠는 우리 가족들의 간절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기가 되어 버렸다.

올케언니는 그 곁에서 뇌 기능이 떨어진 오빠에게 밥을 서너 시간씩 먹였다, 올케언니는 오빠의 몸 기능을 회복시키고자, 눈물겨운 정성을 쏟았다. 환자의 입안을 동굴 속 살피듯 보며 식후에는 치실까지 했다. 오빠 혀가 굳을까 싶다며 말을 걸고 입 모양을 따라 하지 않으면 애가 탔다. 오빠는 이미 난 병이니 어쩔 수 없지만, 올케언니 건강이 더 염려스러웠다. 올케언니는 오빠가 만약 내가 아팠다고 하면 더 온 힘을 다해 간호할 사람이라며 울먹거렸다. 재산을 다 들여서라도 건강을 회복하게 할 거라 했다. 언니의 그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하룻밤이라도 집에서 편하게 잠을 자라고 해도 망부석처럼 오빠 곁을 잠시도 못 비웠다. 결국, 3년쯤 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하더니 언니의 병이 깊어갔다. 서울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언니의 그 정성에도 오빠에 놓아버린 의식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언니의 소원은 누워있어도 좋으니 오빠가 말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하고 바랐다. 올케언니는 투병하면서도 오로지 오빠밖에 없었다. 올케언니는 본인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누워있는 오빠만 바라보았다. 언니는 하루만이라도 오빠보다 더 살게 해 달라고 빌었다. 올케언니는 말대로 집을 팔아 오빠 병시중에 매달렸다. 오빠에게 필요한 재활 운동기구까지 집안으로 드렸다. 딸에게도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절대로 요양원에 맡기지 말고 집에서 모셔달라고. 홀로 남겨질 오빠를 위해 딸이 결혼한 지역으로 갑자기 이사했다. 의식 없던 오빠가 올케언니가 떠나자 이를 앙다물고 음식물을 거부한다고 했다. 올케언니가 오빠를 갓난이 거두듯 해 건강할 때보다 살이 쪘던 오빠였다. 언니가 사경을 헤매며 병원에 있다 보니, 그동안 오빠는 음식을 거부해 수척해져 병색이 짙은 환자의 모습이었다. 올케언니의 장례를 마칠 때까지 요양원에 모셨다. 유리창 너머로 오빠의 초췌한 모습을 보자, 꺼이꺼이 목이 멨다. 아무것도 모르듯 바라보는 눈빛이 가엾기만 했다. 효성스러운 딸이 있기는 하지만 올케언니의 그늘만 할까 하는 괜한 마음에 자꾸 마음이 아려 왔다.

제천을 떠나오며 성현들의 죽음에 관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헤세는 말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길은 눈앞에 있건만 천년을 살 것처럼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며 살다니,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좋은 일에는 한발 앞서 나서고, 죽음에 이르러 가지고 갈 수도 없는 먼지 같은 것에 목숨 걸지 말아야지. 매일 기도하리라 나직하게 자신에게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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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을 떠나오며

김 미 제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도시였다. 제천에서 30분만 더 가면 강원도라고 했다. 강원도라고 하니 그 거리가 실감이 났다. 도착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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