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엔 그랬다. 사람들은 마을에 대한 자긍심보다는 불평이 많았다. ‘빛 좋은 개살구지’ 하면서, 마을 이름에 ‘서울 경(京)’ 자가 들어간 것도 못마땅했다. 비좁고 옹색해 번듯한 마을 안길 하나도 없는 것도 불평이었다. 다른 마을은 거의 있는 시원한 정자 하나도 없다니, 그것 역시 시비 대상이었다. 개도 주인이 미워하면 남들도 더 구박하듯, 대대로 살던 어른들이 마을을 별로라고 생각하니, 갓 결혼해 온 나도 그랬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정자 이야기를 나누면 괜히 가난한 마을인 것 같아 기가 죽곤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사이좋게 지내다가도 ‘후다닥’ 닭싸움하듯 싸우기도 잘했다. 이웃집에 대한 미안함도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을 품앗이하듯 했다. 이런 상황들은 마을에 대한 경외심 부족 현상이라고, 나는 잘난 체하며 비난했다.
삼십오 년을 한자리에서 살다 보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마을 안길은 없다고 해도 뒷산의 숲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 한가하게 앉아 우중충한 풍경에 젖어 있다 보면 뒷산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그 숲은 나무들을 무럭무럭 키워 냈다. 숲은 바람 부는 날이면 이리저리 출렁이며 “나, 이만큼 흔들 수 있어요.” 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멍하게 숲을 지켜보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숲멍’이었다.
가끔 시간이 나는 날이면 뒷산을 산책했다. 그 커 가는 나무들이 보고 싶었다. 그냥 기특했다. 그동안 뒤편에 있다고 알아보지 못한 것도 미안했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안아줄 수 없어 눈으로 사랑을 나누기만 했다. 그들은 눈여겨 봐주는 이 없어도 큰 숲을 이루고 있었다. 뒷산에는 큰길도 없었다. 다니는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길이 되었다. 길을 걷다 보면 산새들도 ‘푸드덕’ 날아올랐다. 나는 생각에 잠겨 걷다가 깜짝 놀라 발길을 멈추기도 했다. 그렇지, 정작 놀란 것은 내가 아닌 저 새였겠네 싶었다. 그들이 사는 동네를 불시에 침범했으니 놀랄 수밖에.
나는 그 숲을 정말 사랑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면서 큰 나무 작은 나무들을 키워가는 숲이 그냥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평온한 사람과 가끔 만나게 되면 나는 그 길을 소개했다. 마치 내가 이룬 숲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작은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냥 내용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푸르게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싱그러웠다. 그 숲을 다녀온 날은 마음을 헹궈 낸 듯 산뜻했다. 내가 그 숲에 다녀오기만 하면,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새로운 기운을 얻곤 했다.
마을 사람들도 언젠가부터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 숲 비탈에는 다른 마을 사람들이 농장처럼 농사를 튼실하게 지었다. 비탈은 붉은 황토 땅이었다. 그 붉은 흙 속에서 지어진 농작물은 연지를 볼에 바른 것처럼 고왔다. 갓 나온 농작물은 탐스럽게 줄을 세운 듯 놓여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감탄이 나왔다. 그 사람들과는 어느새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고구마순, 깻잎, 고추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던 사이 다른 사람들도 숲의 좋은 기운을 알아보고 명당이라며 땅을 사 귀촌도 했다. 묘지도 만들어, 먼저 간 남편을 못 잊어 매일 오는 사람도 자주 보게 되었다. 아까운 나무들이 자리를 비워가는 것이 몹시도 마음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마을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숲 부근에 빌라가 들어선다고 했다. 그 소문이 채 끝나기도 전, 건설 장비들이 게릴라처럼 들이닥쳤다. 마을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굴착기의 무한궤도에서 지르는 소리, 기계톱으로 큰 나무를 베어내는 소리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 장비들 소리보다 더 둔탁하게 ‘턱!’ 하며 쓰러지는 소리가 내 가슴을 후벼팠다. 수십 년의 풍상을 겪으며 마을을 지켜주고 살아왔던 나무들이 내지르는 단말마(斷末魔) 비명이었다. 내 가슴 속에서도 ‘턱’ 하는 메아리가 산산이 부서지며 피를 흘렸다. 큰 나무 작은 나무 할 것 없이 무참하게 도륙되자 벌건 황토만 널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을 땅이 그토록 붉은 황토라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또, 그 황토가 푸른 장정 같은 나무들의 붉은 눈물이라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숲 중앙이 비어 버리니, 심장을 도려낸 몸체처럼 비참해 보였다. 휑하니 뚫린 구멍 속으로 애꿎은 바람만 일렁거리곤 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 숲 공터에 건설 작업자들이 몰려들어 ‘개발(開發)’이라는 미명 아래 각종 소음을 쏟아냈다. 마을 안길은 공사 차량 진입로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을 낮춰 차들을 비켜 가야 했다. 안길 곳곳에 마치 객혈(喀血)한 것처럼 황토가 널려 흉물스러웠다. 어쩌면 이렇게 무법자처럼 굴 수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건물주가 마을 경관이 좋아 숲을 샀다니 할 말이 없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변하기 시작했다. 땅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상전벽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여름 어느 섬에 다녀왔다. 그 마을에는 육백 년이나 된 팽나무가 마을 사람들을 품고 있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팽나무 그늘에 평안한 러닝셔츠 차림으로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평화로워 나도 이 마을 주민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마을은 아무에게나 땅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마을 사람이 될 자격이 있는지부터 심사하는 일이 먼저라고 했다. 빈집 주인은 따로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먼저 선본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선을 보느냐고 물었다. 마을의 땅을 사려는 사람에게 이제껏 살아왔던 내력을 묻고, 또 마을로 들어와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관해서도 묻는다고 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마을이 있어서 놀라웠다. 그건 그 ‘마을의 품격’ 같은 거였다.
그때, 나는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 땅을 강제로 사고 싶다는 미국 대통령, ‘피어스’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인디언들은 대지를 어머니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물을 신성한 대상으로 모시며 살아갔다. 그런 자세는 물질문명만을 숭상하거나 개발만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오늘날의 풍조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었다.
나는 마을 뒷산의 숲을 지키지 못해서 가슴이 아팠다. 이젠 빌라촌으로 변해 자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시멘트 질감만이 무시로 풍긴다. 그 숲이 제대로 보존되었다면 시애틀 추장이 거룩하다고 했던 ‘빛나는 솔잎’. ‘숲속의 안개’, ‘온갖 벌레들’ 뿐만 아니라 새소리와 바람 소리까지 우리를 축복해주었을 것이다.
오늘은 유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야말로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하시(勝花時)가 펼쳐지는 상황이라서 사라진 그 숲이 너무나 그립다 못해 내 가슴 속에서 초록의 깃발로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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