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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쾌락을 위해 먹는 독약[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미래뉴스입니다 2025. 4. 7. 16:35

박 철 한

인간이 잠깐의 쾌락을 위해 먹지만 몸엔 독약과 다를 바 없는 기호식품이 바로 술이다. 기호식품이란 “사람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향기나 맛 따위가 있어 즐기고 좋아하는 식품”을 이른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술만큼 많이 소비되는 기호식품이 또 있을까?

필자가 중학생이던 1970년대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19세기에 세상에 나셔서 90년 가까이 사셨다. 그러니 당시로선 장수하신 편인데 생전에 끼니때마다 반주(飯酒)로 소주를 드셨다. 따라서 필자는 매일 반주를 드시고도 장수하셨던 할아버지를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켜보면서 소싯적에는 “술도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좋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10여 년 동안 하루 세끼 꼬박꼬박 소주 두 잔씩을 마셨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즐기던 반주를 서른 살이 넘어 끊게 된 이유는, 식사 때면 술 생각이 나는지라 어느 날 문득 그것이 술 중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소싯적의 술에 대한 오해가 억울하고 10여 년 간의 반주도 후회되나 이립(而立)이 넘어서나마 중독임을 깨닫고 끊을 수 있었으니 천행이 아니었으랴. 다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사 때면 가끔씩 술 생각을 떨칠 수 없으니 달콤하고도 끈질긴 술의 유혹을 실감하고 있다.

2014년 미국의 생물학자 로버트 두들리 박사는 “과일 중에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알코올 농도가 7%에 달하는 것도 있는데 영장류가 그 과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인간의 알코올 소비는 익은 과일을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된 에탄올을 먹어온 영장류의 과일 섭취 행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요지의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제시했다. 즉 인간이 술을 마시게 된 데는 수백만 년 전 유인원 조상이 발효된 과일을 골라 먹던 데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후 미국 UC 버클리 대학의 캠벨 교수 연구팀이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거미원숭이’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결과는 “파나마 바로콜로라도섬에 서식하는 거미원숭이가 주식인 호보나무 열매를 냄새 맡으며 잘 익는 것만 골라 먹는다. 잘 익어야만 거기에 알코올 1~2%가 생성되기 때문인데 거미원숭이 6마리의 소변을 채취해 검사하자 알코올의 2차 대사물질이 검출됐다. 이는 알코올이 원숭이의 에너지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로 요약된다.

캠벨 교수에 따르면 그 연구결과가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뒷받침하나 원숭이들이 먹는 양으로는 취할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원숭이들이 발효 과일에서 얻은 것은 발효가 안 된 것보다 더 많은 칼로리와 효모균 활동 같은 생리적 이득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조상도 처음에는 원숭이처럼 칼로리 섭취량을 늘리기 위해 에탄올이 생성된 잘 익은 과일을 골라 먹었지만, 액체 형태로 알코올을 정제하여 마시면서 심리적 쾌락을 느껴 알코올 남용에 빠지게 됐을 것이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의 왕 중에서 최고의 애주가는 세조였다는데 그만큼 술에 관한 에피소드도 많단다. 대표적인 사건은 계유정난의 1등 공신으로 세조의 신뢰가 각별했던 정인지가 일으켰다. 세조 4년 경회루에서 대소신료를 불러 베푼 양로연에서 술이 무척 약했으며 세조보다 나이가 21살이나 많은 정인지가 술을 마시고 왕인 세조에게 “너”라고 한 것이었다. 이에 중신들은 처벌을 간청했으나 의외로 세조는 “늙은 영감이 그랬는데 뭘 그러냐.”라며 용서하고 넘어갔다.

그런가 하면 수양대군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종서 장군을 죽인 인물이 양정이다. 그런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양정이 세조에게 “이제 전하께서도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씻을 수 없는 말실수를 했다. 이에 세조가 승지를 불러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줄 것이니 절차를 밟을 것을 명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신숙주가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말려서 간신히 무마되었다. 하지만 양정은 결국 규탄을 받아 4일 만에 사형을 당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정인지 못지않게 세조가 신뢰했던 신숙주도 술 때문에 아찔한 경험을 했다. 신숙주가 술자리에서 세조와 팔씨름을 하여 이기고 의기양양했는데 세조가 신숙주의 충성심을 의심하면 피바람이 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불안했던 세조의 책사 한명회는 신숙주의 하인에게 집주인의 책과 등불을 모두 없애라고 했다. 신숙주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가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는 신숙주가 정말로 취해서 자신을 이긴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도전하겠다는 의미였는지 확인하고자 사람을 시켜 그가 새벽에 일어나는지 알아봤다. 세조는 신숙주의 방에 불이 켜지지 않았음을 전해 듣고서야 신숙주가 만취했다고 생각하며 의심을 풀었다. 만약 한명회의 지략이 아니었다면 신숙주도 죽임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애당초 인간의 술 섭취는 발효가 안 된 것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얻기 위해 에탄올이 생성된 잘 익은 과일을 골라 먹는 원숭이들의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술을 알고부터는 칼로리 섭취와 관계없이 오직 쾌락을 추구할 목적으로 먹으며 육체건강을 서서히 해치고 특히 정신을 순식간에 빼앗겨 죽기도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술 때문에 왕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던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음주운전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니 술을 일컬을 때 ‘잠깐의 쾌락을 위해 먹는 독약’보다 더 적합한 말이 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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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쾌락을 위해 먹는 독약

박 철 한 인간이 잠깐의 쾌락을 위해 먹지만 몸엔 독약과 다를 바 없는 기호식품이 바로 술이다. 기호식품이란 “사람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향기나 맛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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