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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미학(美學)[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미래뉴스입니다 2023. 9. 19. 14:50
박 철 한

마냥 싱둥한 초가을 들녘에 어거리풍년의 기미가 서렸다. 석 달 열흘이나 붉은 단장을 하는 길가의 배롱나무가 한껏 물오른 자태를 뽐낸다.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가 눈앞인데 여태껏 불더위는 떠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며 어깃장을 놓는다. 저만치의 널따란 논배미에는 늙수그레한 농부가 피사리를 하는지 밀짚모자를 쓴 체 기우듬하다. 멀지 않은 냇가의 푸서리에는 버드나무에 매인 소가 비게질을 하고 그 주위를 고추잠자리 대여섯 마리가 나분하게 맴돈다. 그 멋거리지고도 정겨운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근처 느티나무그늘에 앉았다.
쌀을 뜻하는 한자 ‘米’를 해자하면 八十八이 된다. 이를 두고 ‘벼농사를 지어 쌀을 얻기까지 88번이나 손이 가야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해석이 아니어도 전통적인 벼농사를 돌이켜보면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우선 벼농사에서 씨앗을 뿌리고 모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모 농사가 반농사”라는 말에 잘 나타나있다. 볍씨의 싹을 틔우는 일에서부터 못자리에서 모를 키우는 일, 논에 거름을 뿌리거나 두세 번 갈아 써리고 모를 심기까지 적어도 여남은 번의 일손이 들어간다. 모내기를 마치고 날을 잡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 쉬는 것을 써레씻이라 하였다. 모내기는 반드시 소가 이끄는 써레로 논을 골라야 가능했기에 이듬해까지 보관할 써레를 씻는다는 뜻이 있다.
본격적인 벼농사는 모내기 이후부터다. 물을 대고 빼거나 거름주기는 물론 김매기와 새를 쫓아 지키며 벼를 베기까지 수십 번의 손이 가야 한다. 특히 김매기는 모내기하고 한 달 후부터 이삭이 팰 때까지 서너 번을 하였는데 마지막인 만도리가 끝나면 그동안의 노고를 달래려고 날을 잡아 호미씻이를 하였다.
벼가 익으면 낫으로 벼를 베어 논바닥에 깔고 한번 뒤집어 말린 다음 볏단을 묶었는데 만약 말리는 과정에서 비가 내리면 벼가 마를 때까지 여러 번을 뒤집어야 했다. 볏단을 모아 낟가리를 만들고 탈곡을 하고서도 쌀이 되기까지는 거쳐야 할 과정이 여러 번이다. 검불을 일일이 골라내며 갈무리한 벼를 멍석에 말려 절구통에서 쓿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벼농사는 예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선 못자리가 아닌 상자에 볍씨를 뿌려 기계가 모내기를 한다. 호미와 손으로 서너 번이나 했던 김매기도 이제는 풀이 싹트지 못하게 하는 약제를 쓰거나 논에 우렁이를 넣어 풀을 없앤다. 물속에서 풀이 싹트자마자 먹어치우는 우렁이의 습성을 이용하는 것이니 기상천외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가장 획기적으로 바뀐 것은 수확작업이다. 예전과는 달리 콤바인으로 벼를 베면서 짚과 검불, 알곡이 바로 분리되어 나오니 네 단계 과정을 단 한 번에 처리하는 셈이다.
한반도에서 벼는 4,000년 전부터 재배해오면서 가장 중요한 식량작물로 정착되었으니 우리민족의 역사와 맥을 거의 같이 한다. 예전에는 우리의 주식인 쌀이 식량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요즘은 식생활의 서구화로 예전에 비해 한 사람당 쌀 소비량이 오히려 줄었고 대신 고기나 밀가루 소비량은 늘었다. 따라서 쌀은 자급하고도 남음이 있으면서도 전체 식량의 자급률은 30퍼센트를 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고기와 밀가루 등이 쌀을 대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미국 쌀은 우리 쌀의 절반가격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를 두고 단순히 경제논리만을 들어 “우리의 논을 개발하여 다른 산업기반으로 활용하고 그곳에서 얻어지는 이익으로 값싼 미국 쌀을 사 먹는 것이 더 낫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만약 우리의 논이 개발되어 없어진다면 외국쌀 가격이 아무리 오르더라도 사 먹을 수밖에 없다. 인류의 먹을거리는 오로지 대자연의 동식물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국제경쟁력과 관계없이 주식인 쌀이 생산되는 논을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논의 공익적 기능은 그 뿐만이 아니다. 우선 홍수를 막아준다. 벼는 논에 물을 대서 재배하므로 논바닥은 반드시 수평이어야 한다. 따라서 비가 많이 내린다 해도 빗물이 한꺼번에 도랑으로 흐르지 않고 논에 가두어지는데 전국적으로는 그 양이 수억 톤에 이른다. 또한 빗물이 내리자마자 하천으로 흐르는 것보다 논에 고여 있으면 지하로 스미는 양이 많아지니 지하수 저장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 대기정화와 냉각효과는 또 어떠랴. 오늘날 인류는 현대화된 도시들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식물은 그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며 인간이 들이마시는 산소를 밖으로 내보낸다. 녹지공간인 전국의 논이 도시적 용지의 20퍼센트에 가까운 면적이고 보면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기냉각 효과란, 한여름에 논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뜨거운 대기의 온도를 낮추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논은 우리에게 주식인 쌀 외에도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마파람에 일렁이는 논배미에서 한참 동안 피사리를 하던 농부가 집으로 향한다. 농부가 지나는 길옆의 텅 빈 전선이 허전하여 지금은 자취를 감춘 제비가 서너 마리쯤 앉아 지저귀는 정겨운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얄미운 팔월 햇살은 그 이글이글한 열정으로 저 펀더기의 곡식이나 익혔으면 하련만 느티나무를 나서는 이의 살갗마저 따갑게 태우려든다. 여기저기 건성드뭇한 오려논배미에는 어느덧 노르께하니 가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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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철 한 마냥 싱둥한 초가을 들녘에 어거리풍년의 기미가 서렸다. 석 달 열흘이나 붉은 단장을 하는 길가의 배롱나무가 한껏 물오른 자태를 뽐낸다.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가 눈앞인데 여태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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