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후 산책을 나왔다 하루를 충실하게 다 채운 해가 노을 속으로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무대는 빛을 잃어버린 듯 어둠이 스며들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초승달은 선명해졌다. 서쪽 하늘에 색종이로 오린 듯한 초승달을 보는 순간 나는 어린 시절로 빠져들었다.
초승달 속에는 아버지가 애지중지 아꼈던 조선낫이 아직도 그 모양으로 버젓이 있다. 그 조선낫을 반토막짜리 엿과 바꿔 먹었다. 그 조선낫이 사라진 날 아버지는 긴 장대를 들고 나를 뒤쫓았다. 그 낫을 찾아오기 전에는 집안에 발도 못 붙일 줄 알라는 아버지의 화난 모습에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어린 나를 유혹했던 엿은 입안에서 사라져 버렸고, 아버지의 조선낫은 되찾을 길이 없었다. 끝끝내 나는 모른다고 했던 조선낫 이제야 찾았건만, 정작 주인인 아버지는 지금 곁에 없다.
아버지는 술을 못하고 사람들과 왕래가 적은 탓인지 자신의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사람들과 온전한 소통이 어려웠던 것은 장애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농기구도 손수 만들어 썼다. 한겨울에는 방안에 앉아 농기구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침을 먹으면 산에 올랐다. 나무를 베어 와 알맞게 다듬고 불에 달궈 구부려 깎아 내고 망치질로 또닥거리며 온 정성을 다했다. 그런 탓인지 아버지는 농기구를 남에게 빌려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만든 농기구를 인형 바라보듯이 이리저리 돌려보며 아버지의 손재주에 감탄했다. 이런 농기구로 일을 하면 몸에 힘도 덜 들고 일에 능률도 배가 되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아버지는 농기구를 만든 사람의 정성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쓰면 일 욕심만 앞서 농기구를 망가뜨리기 일쑤라고 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잠깐 빌려다 쓰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것은 조선낫이었다. 아버지의 조선낫은 일터로 나갈 때마다 함께했다. 조선낫은 지게 등받이에 걸쳐 있었다. 들에 나가 일손을 움직일 때면 조선낫은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조선낫이 아버지의 손안에 있는 동안은 춤을 추듯 일감을 먹어 치웠다. 저물녘 집으로 오는 길에도 소가 먹기 좋은 꼴이 보이면 아버지는 지게를 세워두고 조선낫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 손에 모아 쥔 꼴은 많은 양이었다. 아버지의 조선낫이 가서 닿는 순간 아무리 서슬 퍼런 풀도 단숨에 조선낫 앞에 엎드렸다. 잠깐이지만 아버지의 지게 위에는 집채만 한 풀 짐으로 채워졌다. 일을 마친 조선낫은 호령하는 장군처럼 풀 짐 맨 위에 꽂혀 있었다. 한창 시절 아버지의 풀 짐은 큰길을 다 메울 듯 풍성했고 걸음걸이도 활기찼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아버지의 등짐은 털 빠진 짐승처럼 초라해졌다.
조선낫은 아버지의 손과 함께 쉴 새 없이 들판에 알곡을 다듬고 거두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산에서 땔감을 해왔다 아버지가 쉬지 않는 한 조선낫은 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손에 들린 조선낫은 가만히 두면 기역자였지만, 아버지 손안에 있으면 일손이었다. 성묘 시기가 다가오면 아버지는 조선낫과 숫돌을 지게 위에 싣고 선산으로 갔다. 아버지는 잡풀이 우거진 무덤에 엎드려 절한 후, 무성한 잡초를 왼손으로 몰아지고 조선낫에 명령이라도 하듯 낫질했다. 조선낫이 지나간 자리는 군인 머리처럼 단정했다. 조선낫은 장애로 외로웠던 아버지 삶의 동반자였다. 아버지는 홀로 들기 무거운 짐도 조선낫으로 한 번 들어 옮겨 다시 힘을 쏟았다. 조선낫은 아버지 농사일만큼은 천하장사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권위를 내세워 무얼 가르치려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보다 편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무서울 때는, 일터에 나가려고 할 때 농기구가 제자리에서 사라져 버렸을 때였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들일은 안 시키는 대신에 농기구 지키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그 당부가 가장 지겨웠다. 친구들은 마음껏 노는데, 누가 언제 와 가져갈 줄 모르는 것을 꼼짝없이 지키는 일처럼 힘든 일이 없었다. 집에 있다 보면 고샅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날은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엿장수는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엿장수는 헌 고무신이나 못 쓰는 농기구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마침 헛간에 조선낫을 보더니 이것은 아무래도 못 쓸 것 같다며 다짜고짜 리어카에 던지며 엿 한 토막을 내밀었다. 나는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순간 엿을 입에 넣었다. 엿장수는 리어카를 밀고 마을을 총총히 빠져나갔다. 엿이 넘어가는 것은 순간이었다. 내 빈손을 보자, 심장이 멎은 듯 두근거렸다. 지금도 아버지가 그 일 때문에 장대를 들고 날 쫓던 꿈을 꾸면 등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저기 서쪽 하늘의 조선낫은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일까.
기사더보기:
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60116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라진 이[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0) | 2023.07.12 |
---|---|
‘삼국지연의’와 역사적 진실[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0) | 2023.07.12 |
저녁노을[미래교육신문] (0) | 2023.06.14 |
시룻번[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0) | 2023.05.24 |
까투리의 모성애[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0) | 2023.05.24 |